EXHIBITIONS

길에서 조우하다

이주원

2019.03.20 ~ 2019.03.27

ABOUT

이주원

 




전시가 연장되어 3월 27일 수요일 오전까지 관람 가능합니다.

이주원 李周原 Joowon Lee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사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석사졸업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응용미술학과 박사졸업
현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교수
개인전
2019 제17회 개인전 (갤러리 밈, 서울)
2017 제16회 개인전 (인사 아트 스페이스, 서울)
2015 제15회 개인전 (아라 아트센터, 서울)
2015 제14회 개인전 (정부서울청사 문화갤러리, 서울)
2014 제13회 개인전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서울)
2013 제12회 개인전 (공 아트 스페이스, 서울)
2013 제11회 개인전 (서울대학교 현기순 홀, 서울)
2013 제10회 개인전 (Gallery Bennett, Newjersey, USA)
2011 제 9회 개인전 (공 아트스페이스, 서울)
2009 제 8회 개인전 (KCC Gallery, Newjersey, USA)
2009 제 7회 개인전 (엠 갤러리, 서울)
2009 제 6회 개인전 (OS갤러리, 전주)
2008 제 5회 개인전 (GS타워 로비갤러리, 서울)
2008 제 4회 개인전 (웨이방 갤러리, 서울)
2005 제 3회 개인전 (Tina Newton Asian Art Gallery, Birmingham, USA)
2004 제 2회 개인전 (인사아트센터, 서울)
2001 제 1회 개인전 (공화랑, 서울)
단체전
2019 한라에서 백두까지 회화 33인전 (인사아트프라자, 서울)
2018 창원조각비엔날레 - 불각의 균형 (성산아트홀, 창원)
2018 멘토-멘티전 (한원미술관, 서울)
2018 전등사 그 이후전 (인디프레스 갤러리, 서울)
2017 현대중견작가전 (전등사 미술관, 서울)
2017 멘토-멘티전 (한원미술관, 서울)
2017 한국의 진경 - 독도와 울릉도 (예술의 전당, 서울)
2017 한국화 바탕을 버리다 (필갤러리, 서울)
2017 멘토멘티전 (한원미술관, 서울)
2016 연과 연 사이 (필갤러리, 서울)
2016 PLAS 2016 (코엑스, 서울)
2015 제49회 한국화회전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14 서울오픈아트페어 2014 (코엑스, 서울)
2014 제48회 한국화회전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13 Spirit of Korean painting (갤러리 이배, 부산)
2013 제46회 한국화회전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13 남송 국제아트쇼 (성남아트센터미술관, 성남)
2013 응미전 (한양대학교 박물관, 서울)
2012 DOORS ARTFAIR 2012 (임페리얼팰리스호텔, 서울)
2012 한국미술 소통의 흐름을 위한 - 미술대학 교수교류전(공평갤러리, 서울)
2012 제45회 한국화회전(GALLERY LVS, 서울)
2011 여름생색전(공아트스페이스, 서울)
2010 행복한 그릇전(공아트스페이스, 서울)
2010 제43회 한국화회전(동덕아트갤러리A관, 서울)
2009 KIAF 2009(코엑스, 서울)
2009 제42회 한국화회전(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09 코스메틱잼전(인사아트센터, 서울)
2008 Modern Asian Paintings Art Exhibition(Oregon state capitol, OREGON,USA)
2008 제41회 한국화회전(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07 SFAS-서울파인아트쇼(예술의 전당, 서울)
2007 The Edge of Sensation(Simon gallery, 서울)
2007 동시대를 앞선 10인의 작가전(Galley priors, 서울)
2007 GIAF-베이징전(북경 한국문화원 전시실, 북경, 중국)
2007 DREAM-Contemporary Artworks on paper(C.G Boerner Gallery, Newyork,USA)
200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60주년 기념전(서울대학교 박물관, 서울)
2006 한국화회전 (한국일보미술관, 서울)
2006 전시기획자가 선정한 오늘의 작가전(광화문 갤러리, 서울)
2005 현대한국화 오늘과 내일전(이형아트센터, 서울)
2004 Black &White(Tina Newton Asian Artgallery, Birmingham, USA)
2003 동양화 Paradiso전(포스코미술관, 서울)
2002 Around Us전(신도리코문화공간, 서울)
2001 제4회 LUX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2000 서울대학교와 새천년전(서울대학교 박물관)
1999 한국화-새로운형상과 정신전(덕원갤러리, 서울)
1998 채묵-형상전(덕원갤러리, 서울)
1998 27인의 자연전(인사갤러리, 서울)
1998 제3회 LUX전(웅전갤러리, 서울)
1997 제2회 LUX전(서경갤러리, 서울)
1996 채묵-형상전(예술의 전당, 서울)
1996 포일전(서울대학교 문화관, 서울)
1995 채묵-형상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1995 서울대-동경예대 드로잉교류전(동경예대미술관, 동경, 일본)
1995 한국화-새로운 형상과 정신전(도올아트센터, 서울)
1993 작업동인전(백악미술관, 서울)

평론글
방랑하는 자에 대한 백과사전: 이주원 편

<어떤 방랑자 1>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지금 그대는 위인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에 상처받고, 소인배들이 휘두르는 가시에 긁히고 있다. 숲과 바위는 그대 곁에서 품위 있게 침묵할 줄 안다. 다시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처럼 되어라. 침묵 속에 귀 기울이고 있는 아름드리나무처럼 되어라. 바다 위로 가지를 드리운 채.”1)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겪는다. 상처는 우리를 정체된 일상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한다. 상처를 겪은 직후에 고독과 마주하는 것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고독이라는 이 메마른 침묵은 심연의 고통을 받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부추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마법이 일어난다. 고독이 우리의 아픔에 화답해주기 때문이다. 허기와 피로에 사로잡힌 채 우리는 “측량할 길이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2), 그저 지친 몸뚱이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적나라한 모습으로 내팽겨지는 순간, 우리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선다. 걱정과, 고뇌, 은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모습이 낯설어진다. 저 지평선 위로 말없이 쏟아지는 달빛만이 중요해질 뿐이다.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침묵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까지도.

1)Nietzsche, Friedrich Wilhelm, Also sprach Zarathustra,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열린책들, 2015. 번역문 일부를 수정함.
2)Hesse, Hermann, Demian: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2009, 172쪽.

<어떤 방랑자 2>

“욕망의 내부에는 수도사와 정육점 주인이 서로 싸우고 있다.”3)

마법같은 햇빛이,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바다로 나아가는 배들이 이 아름다운 봄날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는 결심을 한다. 이 순간만큼은 휴대전화에 시선을 주지 말자고.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휴대전화에 손을 뻗는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우리가 매우 참아내기 힘든 고통스러운 말이다. 우리는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정작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워한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존재방식의 선택 사항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흡인력에 매 순간 저항해야만 한다. “방랑자의 자유에는 현기증이 따른다. 발에 살갗이 벗겨져도 계속 걸으려면, 고독 속에서도 여전히 길을 믿으려면,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방랑자는 길의 노예이며, 길은 방랑자에게 자신의 법칙을 강요한다. 길은 무자비하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물병을 잘못 닫아도, 신분증을 잃어버려도, 식량이 부족해도, 상처를 잘못 치료해도 여행은 끝이 난다. 길은 인정사정없는 처형자다.”4)

3)Cioran, Emil, Syllogismes de l'amertume, 김정숙 옮김, 『독설의 팡세』, 문학동네, 2012.
4)Richemont, Blanche de, Manifeste vagabond, 김성희 옮김, 『방랑자 선언』, 문학테라피, 2013, 73쪽.

<나의 집>

‘나의 집’은 정착한 자의 집이 아닌 방랑하는 자의 집이다. 그래서 방랑자는 그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정착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집’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집이다. 언제든지 들어왔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세상 밖으로 개방된 집이다. 안과 밖이 분리된 정착민의 집과는 달리 방랑자의 집은 경계가 없다. 안팎을 구분 짓는, 단속하는 문과 창이 없으니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집안에 있는 것인지 집밖에 있는지 모른 채 바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릴 뿐이다. ‘나의 집’은 중앙아시아를 떠도는 유목민의 유르트(yurt)5)를 연상시킨다. 유목민들에게는 방랑이 생존이고, 생존이 곧 방랑이다. 하지만 방랑은 끝없는 방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방랑자에게 가장 힘든 시련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방랑자들은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쉬기 위해서... 사막의 거친 기운이 잠잠해지면 유목민은 방랑을 잠시 멈추고 유르트로 돌아온다.

“불타는 고비사막금빛 가을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며목동이 낙타를 앞으로 몬다.그리고 사냥개도 같이그들의 여정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이 하늘과 합쳐진다.가장 높은 혹에서...

몽골의 유르트로 변하는 혹이토록 몽골의 대평원이 눈부셔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동안, 그리고 내 영혼 속의 사랑스러운 녹색 제국이 결코 멸망한 적이 없는 동안...순백의 몽골 유르트는나의 마지막 진정한 집이 아닌가?”

- 하다 센두(Hadaa Sendoo)6), 『유목민』

5)유르트(yurt)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이동식 전통가옥이다. ‘나의 집’처럼 원뿔모양이다. 유르트(yurt)의 어원은 투르크어의 "고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유르트의 공간은 천상계, 중간계, 지하계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세계로 구성된다. 꼭대기는 하늘 왕관을, 가장자리는 지평선을 상징한다. 유르트는 사후에도 사람들의 영혼을 품고 있다고 한다.
6)하다 센두(Hadaa Sendoo)는 몽골 출신의 세계적 시인이다. 이 지면을 빌어 처음으로 국내에 그의 시를 소개한다.(https://www.poemhunter.com/poem/three-poems-of-hadaa-sendoo/#content. 2019.2.28.).

이주원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892년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사후 텍스트가 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사의 중대한 논쟁거리 하나를 촉발시킨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사진기술의 발달에 따른 예술작품의 본질적 변화, 즉 예술작품이 품고 있던 아우라7)의 붕괴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주원의 작품에서 사용된 흑백 네가티브필름은 기술복제시대의 산물이다. 기술적으로 이 필름은 무한 복제될 뿐만 아니라 이 필름을 슬라이드 마운트에 장착하여 환등기로 투사된 이미지 또한 무한 복제된다. 어디까지 원본인지 어디까지 복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이주원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품은 아우라는 원본같은 복제와 복제같은 원본에서 방황하고 있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유일하고도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아우라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자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자락이나 나뭇가지를 보았을 때, 바로 그 순간 산이나 나뭇가지가 미풍처럼 숨 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아우라의 체험이라고...8) 이 때 우리는 자문한다. 이러한 체험은 속세를 떠난 수도자나 선승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사람들’의 특권이 아닌가? 자칭 ‘보통사람’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한 우리는 세상에서 도피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하고 있다. 먼 것은 먼 것이고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이지, 구태여 먼 것을 가까이 가져오려고 시정쓸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잠시 스쳐지나갈 아름다운 세상풍경을 향해 한가롭게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야 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우리는 사회가 짜놓은 틀과 적당히 타협하며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일부 땅끝 지역으로 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사슬에 의해 늘 세상에 묶여 살아간다. 종신형에 처한 처지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이지만 우리는 빛바랜 사진첩에서 혹은 이미지 파일 창고에서 들춰 낸 어린 시절 얼굴들, 그리고 풍광들을 발견한다. 이때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과거의 시공간을 찰나적 충만감으로 끌어들인다. 과거의 현장이 지금 내 안에서 파노라마처럼 숨 쉬는 느낌을 받게 된다. 두 번 반복될 수 없는 아우라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비록 내가 대하는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의 원작이라도, 모나리자의 이미지가 내게 미풍처럼, 숨결처럼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 한 아우라는 자취를 감춘다. 기술복제시대의 도래로 원본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원본이든 그것의 복제본이든 서로 호흡하듯 나와 교감할 수 있다면 아우라는 베일을 벗기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속되는 아우라의 상실경험은 세상 안에 머문 정착한 자의 비애인 것이다. 다시 이주원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되돌아가 보자. 지금 우리는 환등기를 통해 벽에 비친 80컷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 길 위에서의 현기증을 포착한 창작물이다.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환등기에 장착된 네가티브필름에 각인된 이미지가 원본인가? 아니면 이 필름 이미지를 통해 벽에 비쳐진 이미지가 원본인가? 아우라는 원본같은 복제와 복제같은 원본에서 배회하고 있다. 우리 앞에 80컷의 이미지 파노라마가 마치 방랑자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다 어느 한 컷이 우리를 향해 달려올지도 모른다. ‘다른 어딘가’의 힘에 이끌려 잠시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순간을 헤르만 헤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온 세상이 마법에 걸려 영원히 잠들고 꿈의 궤도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이따금씩 유연하고 탄력 있으면서도 깜짝 놀라게 하는 움직임과 함께 저 잠든 듯한 어둠을 뚫고 수정과 황금의 번쩍이는 빛이 비쳐 나왔다.”9) 우리는 이제 이주원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떠나기 전 불편한 질문 하나. 나는 아직 먼 길이 남아있는 방랑하는 자인가? 아니면 나는 세상에 발이 묶여있는 정착한 자인가?

-글. 성시정

7)아우라(aura)는 원래 고대 희랍어의 기원에 따르면 미풍(breeze) 혹은 숨결(breath)을 의미한다.
8)Benjamin, Walter,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 길, 2007. 109쪽과 184쪽.
9)Hesse, Hermann, Das Glasperlenspiel: Versuch einer Lebensbeschreibung des Magister Ludi Josef Knecht samt Knechts hinterlassenen Schriften,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제1권, 민음사, 2011, 169쪽.

<성시정>
1960년生. 현재 인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종교문화분석 및 해석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문화이론, 서양사, 예술사, 심리학, 철학, 사회학, 신학, 종교학, 민속학, 초심리학 강좌를 듣느라 7년간 ‘유목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문화인류학 해석론의 위상과 전망≫, ≪UFO학과 인류학의 조우≫, ≪철학자들과의 수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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