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

Preparing for the exhibition.
전시 준비 중입니다.
M'VOID

너의 방에 숲이 무성할 때

Kwon Inkyung

2026.08.26 ~ 2026.10.30
M’VOID는 통찰적 사유로 작품 세계를 다져가면서 동시대 미학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중진 작가와 해외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고 선보이는 프로그램입니다.
M’VOID is a program that plans and presents exhibitions of leading artists at home and abroad who question contemporary aesthetic values while strengthening their works with insights.

ABOUT

Kwon Inkyung

 

 

너에게 닿는 선이 부디 하나가 아니기를

 

 

1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가진 의문이 있다. 우리는 왜 가까워질수록 선을 없애려고만 하는가. 사이가 깊어진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늘 선을 지우는 일을 한다. 존댓말이 반말이 되고, 아무에게도 안 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집에 초대를 하고, 늦은 시간에 연락해도 실례가 아닌 사이가 된다. 그런데 되짚어보면 이 일들은 전부 같은 일이다. 나를 더 보여주는 일인 것이다. 반말은 고른 말투 뒤에 있던 기분을 보여주고, 속엣말은 아무도 모르던 내면을 보여주는가 하면, 집으로의 초대는 취향부터 사는 방식까지 보여준다. 선이 지워질수록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보일수록 가까워졌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여기까지만 보여주겠다는 태도, 그러니까 "선 긋는다"라는 말은 대부분 서운함의 표현으로 쓰인다. 선을 긋는 사람은 야박한 사람이 된다. 가까워지는 일에 반대 방향은 없다. 가까워질수록 선을 긋는 사이를 아직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방향의 끝에는 연인이라는 관계가 있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끝내 보여주지 않는 것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라, 모든 선을 지우는 일은 대개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곤 한다. 그런데 모든 선을 지운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토록 가까웠던 사이가 모르는 사람보다 더 먼 사이가 되는 것이다. 연락처를 지우고, 마주칠 것 같은 길을 피하고, 공통의 친구들 앞에서 서로의 이름을 삼간다. 멀어진 친구와는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는다. 연락이 뜸해지더라도, 마주쳤을 때 굳이 모른척하지는 않는다. 오직 모든 걸 보여줬던 사이만이 이렇게 부서지는 것은 물러날 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는 아닐까.

 

 

2

 

이러한 선이 어디까지 보여줄지, 혹은 드러낼지를 암묵적으로 정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집은 이 일을 사물들로 구체화해놓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집을 두르는 벽은 나와 타인을 경계짓고, 그 벽을 넘어 드나들게 하는 문은 경계 안으로 들어올 허락을 요하게 한다. 그리고 벽에 뚫린 창은 허락과 무관하게 내부와 외부를 이웃시킨다. 그런데 이 창이라는 것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사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드러내게 되는 사물이라는 데에서 문과는 다른 성질을 지닌다. 그렇기에 창 앞에 커튼을 쳐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커튼을 다 치게 되면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게 된다. 결국 내다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조금은 보일 수밖에 없다.

 

권인경의 열린 방(2025) 연작이 마주보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창들이다. 정면으로 마주 선 건물의 벽면에 창들이 나란한데,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도 있고, 커튼이 반쯤 걷힌 방도 있다. 또 화분에 가려 안이 살짝 비치는 방도 있다. 전부를 내보이는 창도, 완전히 닫힌 창도 없이 어느 창이든 조금씩 열려 있고, 그 열린 폭마다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나란히 늘어선 방들인데도, 드러내는 폭은 하나도 같지 않다.

 

이 폭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방마다 주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갓 지어진 아파트의 수백 세대는 전부 같은 공간이지만, 입주하기 전에는 아직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공간이다. 거기에 누군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커튼을 치거나, 창가에 식물을 두거나 저마다의 삶의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그제야 비로소 똑같던 공간들은 서로 다른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벽면에서 어디까지가 한 집인지는 분간되지 않는다. 아파트는 세대로 세어지지만, 그림의 벽면에는 저마다 다른 폭으로 열린 방들만 나란하다. 방 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세계인 셈이다. 열린 방의 벽면이 보여주는 것이 그 장면인 듯하다. 각자 드러내는 폭이 마치 그 사람의 폭이라는 것처럼.

 

그런데 이 방들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가 이상하다. 벽이 되고 기둥이 되고 가구가 된 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고서다. 이 방들의 뼈대는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수백 년 전에 쓰여진 문장들이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을 걱정하고, 살림을 근심하고, 사람의 도리를 되새기는, 시대의 옷만 다르게 입은 우리 이야기다. 다만 오려 붙인 이야기다. 가위가 지나가면서 글자들은 원래 있던 책에서, 원래 속해 있던 문장에서 잘려 나왔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이 보이고 그 뜻도 알 수 있겠으나, 이 글자가 어떤 책의 어느 대목에서 왔는지, 앞뒤에 무슨 말이 있었는지는 절단면 너머로 사라지고 없다. 같은 글자도 어느 문장 속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는데, 그 문장이 잘려 나갔으니 글자만 남고 맥락은 떠난 셈이다. 그러나 콜라주는 자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잘린 것을 어딘가에 다시 붙이는 기법이다. 이 벽 위에서 글자들은 원래 책에서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다른 책의 글자들과 이웃이 되고, 잃어버린 문맥의 빈자리에 새로 지어진 문맥이 들어선다. 우리 사는 모습이 꼭 이렇지는 않을까. 관계란 어쩌면 서로의 잘린 조각을 이어 받아 제 벽에 붙이는 일은 아닐까.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지만, 버려진 것 또한 없다.

 

오래된 이야기 곁에 오늘을 살아내는 이야기도 있다. 안과 밖의 경계에 초록이 걸쳐져 있다. 창가의 화분, 난간을 넘어 흘러내리는 넝쿨, 창틀에 늘어진 잎들. 저마다 하나의 세계, 그러니까 저마다 사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물이다. 그런데 이 사물들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디까지 자라고, 경계를 넘을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방들은 그렇게, 마저 쓰일 이야기를 살아있는 것들에게 맡겨두었다.

 

 

3

 

그 맡겨둔 초록이 자랐다. 이듬해의 연작 너의 방에 숲이 무성할 때(2026)에서 방들은 숲에 잠겨 있다. 드러낸 만큼 바깥이 들어온 것이다. 언뜻 침입처럼 보이지만, 침입이라면 이렇게 질서 있을 수가 없다. 여전히 화분에 담긴 식물이 있는가 하면, 방 한복판까지 들어온 덩굴도 있다. 방은 식물마다 다르게 곁을 내주었고, 식물들은 저마다 내준 만큼만 들어와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초록들이 들어온 것인지 나간 것인지는 분간되지 않는다. 방 안 화분에서 자란 덩굴이 창을 넘어 바깥의 숲과 이어져 있고, 안의 잎과 밖의 잎이 어디서 나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재료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수풀의 잎들이 고서 조각으로 되어 있다. 열린 방에서 벽이 되고 가구가 되던 이야기가, 여기서는 숲이 되고 있는 것이다.

숲이 경계를 흐렸다면, 그림 가운데에서 가장 또렷하게 경계짓고 있는 것은 폭포다. 그런데 이 폭포를 이루는 물은 사실 경계 짓기에 서툰 사물이라 할 수 있겠다. 스미고, 번지고, 구분을 뭉개기 때문이다. 그런 물이 여기서는 방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리며, 이쪽과 저쪽을 가른다. 물살이 두꺼운 한가운데는 저쪽을 온전히 감추고, 얇아지는 가장자리는 저쪽을 어슴푸레 비추기도 한다. 감추고 싶은 것과 끝내 드러나고 마는 것이 하나의 사물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이 방에서 가장 또렷한 경계가, 정작 붙잡을 수도 잠글 수도 없다.

 

그림이 드러내는 또 다른 경계는 작가의 위치에 있다. 하나의 소실점을 갖는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 한 곳에 메여 있다는 의미인데,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은 영영 볼 수 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앞서 본 열린 방은 건물을 반듯하게 마주 보고 그려진 것이라면, 이 그림은 방마다 옮겨 다니며 그려졌다고 볼 수 있겠다. 위층 방은 내려다보고 아래층 방은 올려다보며, 어떤 방은 정면으로 마주 보는데, 이는 한자리에 서서는 나올 수 없는 각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인경은 어느 한 곳에 메이지 않았던 셈이다.

 

작가의 메이지 않은 위치는 관객의 위치로 건너간다. 그러나 관객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점을 건네받을 뿐이다. 잎에 반쯤 가린 방은 그 반쯤의 시점으로, 물의 장막 뒤 방은 물살 너머의 시점으로 주어지는 식이다. 그래서 관객은 방마다, 여기까지는 보여주겠다는 저마다 다른 허락을 건네받는 셈이기도 하다. 창은 안이 내다보는 만큼 밖이 들여다보이게 되는 틈이어서, 방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폭만큼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정작 그림에는 작가도 관객도 누구도 없는 것이다. 마주한 순간 4(2026)를 보면 탁자에 꽃이 꽂혀 있고 안쪽 방의 문까지 열려 있는데,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흰 이불이 부풀어 있는 침대도 방금 누군가 빠져나간 것처럼 보일 뿐, 끝내 비어 있다. 그 부재를 사물들이 대신 서술하고 있다. 자리를 비킨 인물은 고서 속 이야기를 살던 이일 수도, 꽂아둔 꽃과 가구의 취향을 가진 이일 수도 있다. 문장으로 구성된 소설 속 인물이 읽는 사람의 수만큼 다른 얼굴을 얻듯, 이야기로 지어진 방에 누가 사는지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그려지게 된다.

 

 

4

 

그렇게 누구의 방도 될 수 있다면, 아예 문을 활짝 열어두면 그만 아닐까.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환대할 때, '문을 활짝 연다'라는 관용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조건 없이, 누구든, 언제든 환대할 수 있을까. 열린 방을 다시 보면 이 말이 모호해진다. 모든 방이 활짝 열려 있었다면 그것은 삶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건축 골조의 단면도였을 것이다. 훤히 열렸다는 말이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곁에 반쯤 걷힌 방과 살짝 비치는 방이 있기 때문이다. 문턱이 없으면 넘어설 것도 없고, 안이 없으면 맞아들일 곳도 없다. 문이 언제나 열려 있는 집은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환대라는 허락에는 이상한 성질이 하나 있는 셈이다. 전부를 허락하면 허락이 사라진다.

 

그러니 누군가를 들이는 일은 문을 없애는 일이 될 수 없다. 들인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까지 들일지를 정하는 일이다. 거실에서 차 한잔 나누는 사이가 있고, 식사까지 내어주는 사이가 있고, 자고 가라며 침실까지 내어주는 사이가 있다. 그림의 방들 또한 숲을 전부 들이지도 않았고 전부 막지도 않았다. 이 차이는 야박함이 아니다. 이 차이가 있어야 안쪽이 생기고, 안쪽이 있어야 누군가를 안으로 들였다는 말도 성립하는 것이다.

 

열린 방에서 초록은 경계를 드러냈고, 너의 방에 숲이 무성할 때에서는 방 전체를 덮었다. 그러나 이는 숲 전부를 들인 것이 아니라 들이는 폭을 다시 정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방이 숲에 잠기고도 숲이 아니라 여전히 방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그림을 보지 않고, "사람 하나 없는 숲에 잠긴 방"이라는 말만 듣는다면 세상을 등진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방이 식물로 잠길 때까지 걷어내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사람이 없거나 더 숨으려 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집이라면 식물이 숲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까. 무성함은 어쩌면 발길이 끊긴, 혹은 끊은 시간의 두께로 읽힐 수 있기에, 잠긴 방은 스스로를 가둔 사람의 초상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초상은 낯설지 않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은 안쓰러운 사람이었고,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었고, 모임에 빠지는 사람은 어울릴 줄 모르는, 이른바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고쳐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오랜 기간 고침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은 달라졌다. 일인석은 구석에서 창가로 옮겨왔고, 혼자 보낸 주말은 변명이 아니라 자랑이 되었다. SNS만 보더라도 계정을 잠가두거나, 보여줄 사람을 골라 나누는 식으로 자기 방식을 굳이 숨기지 않게 되었다. 다 내주지 않으면서 곁에 있는 것이 관계의 결함이 아니라 관계의 기술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문틈의 폭은 그대로인데, 그 폭을 읽는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같은 틈이 어떤 시대에는 증상이었지만 다음 시대에는 방식이 되었다. 무엇이 병이고 무엇이 방식인가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다시 그어져 왔다.

 

삼백 년 전 그림의 구도에서도 관점에 따라 선은 다르게 그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척재제시(惕齋題詩)(1740~1741)에는 커다란 파초와 나무에 둘러싸인 사랑방이 있다. 마당의 초록이 바깥의 시선을 가려, 담 밖에서는 그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등을 돌린 은둔의 그림이라 읽는다면 거기서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앉은 이의 눈으로 보면 안팎이 뒤집힌다. 가려진 것은 바깥의 시선뿐이고, 안에서는 마당 너머까지 훤히 트여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척재제시는 숨는 일과 내다보는 일을 동시에 서술한다. 어쩌면 권인경의 숲도 이와 같은 독법을 기다려온 것인지 모르겠다. 관계를 끊은 결과가 아니라 관계를 가장 세밀하게 매만진 결과로 읽어주기를. 삼백 년 전의 방식이 지금 다시 그어지고 있는 셈이다.

 

 

6

 

숲은 세어지지 않는다. 나무는 한 그루 두 그루로 셀 수 있지만, 숲은 몇 그루가 있어야 숲이라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무성하다는 것은 그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셀 수 없이 겹쳤다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권인경이 방마다 그어둔 경계도 그렇게 세어지지 않는다. 잎에서 한 번, 물살에서 한 번, 창틀에서 한 번씩 겹쳐 있어,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부터가 밖인지 끝내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선을 지워왔다. 하나씩 지우다 마침내 하나만 남는다. 그렇게 모두 내어주고 나면 그 사이에 머물 데가 없어 관계는 더 위태로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더 명확한 선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은 선이 아닐까. 넘어도 되는 선과 넘으면 안 되는 선이 겹겹이 있다면, 관계는 전부와 전무 사이 어딘가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너의 방에 숲이 무성할 때' 이 제목이 축원처럼 읽히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너에게 닿는 선이, 부디 하나가 아니기를.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권인​경 Kwon In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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